imagine

- 2012-03-05

[하나의 私見] 막막함에 대한 존중

나는 왜 나의 젊음을, 또한 그 젊음으로 인한 고통을 설명할 수 있는 나만의 언어를 고안해내지 않고 세대론이나 멘토들의 잠언에 의존할까. 이 질문에서 시작한 매우 주관적이고 사적인 영화 읽기. 영화 <허수아비>에는 몰라서 막막한데도 의존하지도, 도망가지도 않는 사내가 나온다. 대신 그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어떻게 된 일인가!

(본 리뷰에는 <허수아비>(제리 샤츠버그, 1973)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 @latinsamba

어른 말씀에 조아리고 싶은 욕망

현재 개봉작도 아니고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이 나온 것도 아닌, 이 오래된 영화를 보게 된 사연은 이렇다. 매년 초, 서울아트시네마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열어 다양한 감독과 배우가 소개하는 영화를 상영하고 관객과의 대화도 갖는다. 1973년 칸느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제리 샤츠버그의 <허수아비>는 이창동 감독이 선택한 영화였다.

그는 추천의 글에서 "영화 속 풍경이 요즘 젊은이들의 내면의 풍경과 비슷하다고 느꼈다"고 썼다. 이 말이 마음을 끌었다. 물론 세대론을 그다지 믿지 않는 나로서는 젊은이''의 내적 풍경이라고 하기에는, 그 젊은이들이 너무나 제각각이지 않나 싶긴 했다. 또래라 하더라도 계급, 젠더, 학벌 그 외의 무수한 조건에 따라 균질적이지 않으며 그만큼 마음 속 정경도 모두 다르리라.

영화로 예를 들자면, <타임 투 리브>(프랑소와 오종, 2006)에는 아무리 허비해도 삶이 동나지 않을 것 같던 젊디젊은 남자가 나온다. 그런 그가 시한부 암 선고를 받고 처음으로 찾아가는 사람은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아니라 할머니이다. 질병을 가진 후, '젊음'은 그 자체로 그에게 너무나 마음 아픈 과거이자 질투의 대상이 된다. 이제 그의 동지는 느리고 빌빌대는 노인들이고, 동료의식을 매개하는 것은 취향이나 일, 쾌락, 역사의식 등이 아니라 죽음과 소멸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동일시하고 공감하는 대상은 연령과 무관한 경우가 많다. 그만큼 젊은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감성이라는 것은 허구다. '생각'은 이렇지만, 이 생각대로라면 저 추천사에 마음이 동할 이유가 그다지 없다. 추천사에 끌린 이유는 조금 더 감정적인 문제였다.

나는 이창동 감독이 젊은이들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 한번 젊은이들의 내면을 (그런 게 있다면!) 당신은 어찌 보고 있는지 펼쳐 보쇼!' 하고 호기롭게 까려는 마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명한 어르신이 '너희들 마음속 풍경은 이렇지 않니' 하고 슬쩍 내비치면 '옳습니다, 옳습니다' 하고 그 아래 조아리고 싶은 욕망에 더 가까웠다. 이는 추천의 의도를 완전히 빗겨난 것이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욕망이 있었다. 이제 20대를 살짝 벗어난 나이이기는 하나 그래도 연세 지긋한 노감독보다야 젊음을 관통하고 있을 인간이, 오히려 그에게서 젊음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이상한 욕망.

이 의존성,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는 사실 그다지 당황할 것 없는 익숙한 욕망이다. 물론 20대를 규정하려는 시도를, 의존성으로만 환원시켜 설명할 수는 없다. 자기 세대의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비교항으로서 20대를 이용한다거나(386 세대의 경우), G세대로 대표되는 "'20대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포섭 전략', 즉 자신의 규정에 들어오는 20대가 정상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구실"(이택광)로 세대론을 전파하려는 시도를 간과할 수는 없다.

G세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전후에 태어난 세대로 글로벌 마인드와 외국어 구사 능력으로 무장하고 자란 ‘글로벌 세대’를 말한다.

하지만 '당사자 운동'보다는, '위대한 멘토(이외수, 김태원, 김난도 등등)'나 세대론에 매달려 내 고통에 이름을 붙여달라고, 내 처지를 설명해낼 '언어'를 만들어 달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지침("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88만원 세대>)과 위로 ("그대, 좌절했는가? 잊지 말라. 그대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아직 그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아프니까 청춘이다>)에 안주하는, 질긴 의존성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왜 답을 직접 생성하지 못하고, 다만 간절히 구하는 것일까. '멘토링'의 이데올로기적 함정 말고, 이를 추진하는 개인의 감정은 무엇일까. 아니, 개인까지 갈 것도 없이 내 '내면의 풍경'은 무엇일까.

내가 느낀 저 의존성은 실은 ‘정말’ 모르겠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감독이 <허수아비>라는 영화의 정경이 젊은이들의 내면의 풍경과 비슷하다고 했을 때나는 도대체 저 영화가 어떤 정경을 품고 있을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굉장히 화가 나고 곤두서있을 것도 같고, 쓸쓸할 것도 같고, 답답할 것도 같고, 피상적이고 천박할 것도 같고, 우울할 것도 같고, 우울하여 죽어버리고 싶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죽을 만큼 우울한 건 또 아닌 정도일 것도 같았다.

한 마디로 젊은이들 각 개인이 불균질한 만큼이나, 내 속에도 일관된 내면의 풍경이 없었다. 여러 감정들이 분화되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덩어리로 어딘 가에 턱 걸려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누가 좀 네 내면 풍경은 이거다! 결정 지어줬음 좋겠기도 하다. 그것이 기든 아니든 상관없이.

이것은 아이러니다. 그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규정하기 힘들다.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경험하고 있기에, 그리고 경험은 용어와 달리 지극히도 복잡하기에 명쾌하게 정의내릴 수 없다. 반면 누군가 명쾌해질 수 있다면, 그는 과거에는 앓아본 ‘적’ 있을지 모르나 현재는 앓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젊음이든, 뭐든. 그러나 모호함은 불안을 야기하므로 오히려 경험하고 있는 자들이, 경험하고 있지 않은 자들에게 답을 구하러 가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가장 핫한 문장이 괜히 “불확실성 속에 있으므로 버겁고 어두운 시기가 바로 청춘이다”인 게 아니다. 물론 여기에는 고용과 생존의 불확실성을, 보편적인 심리적 문제로 환원하여 버티라고, 이는 모두에게 주어진 ‘인간’의 조건이므로 낙오하면 그것은 네 개인의 책임이라고 믿게 하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일말의 진실도 품고 있다. 어떤 삶을 살아내고 있을 때, 바로 그 경험이 의미하는 바는 명쾌하게 인식되지 않는다. 끝없는 의문만이 반복된다. 그리고 내가 영화에서 어떤 ‘내면의 풍경’을 봤다면, 그것은 바로 이 ‘모름’이었다. 주인공 중 청춘에 속하는 프란시스가 보여주는 초반의 밝음과 긍정은 후반부로 갈수록 사그라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통의 원인도, 무엇과 싸워야하는 지도 모르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결국 총체적인 거부를 온몸으로 드러낸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자.

 

사진 사진 사진 사진 사진